내 고향은 심심산골 작은 마을이다.
6,25가 난 것도 한참후에 일았다는 곳이다
마을 앞에는 조그만 강이 흐르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강 건너에는 광산 김씨 집성촌 우리 마을은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
김씨 마을 훈장님과 정씨 마을 훈장님이 딸과 아들을 혼인 시켰으니
그분들이 내 부모님이시다.
내가 기억하는 외가는 부자였다.
머슴과 찬모가 있었으며 방도 여러개이고 곡식을 저장하는 큰 창고도 있고
소,돼지,닭 거위들도 많았다.
설날이면 외할아버지께 세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섰는데
큰외숙모는 종일 부엌에서 떡국을 끓이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외가의 막내 아가씨로 태어난 어머니는 고생모르고 자랐는데
양반가의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오셔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막내딸이 견디지 못하고 혹시 친정으로 다시 오지 않을까
3년을 밤이면 대문 밖을 서성 이셨다고 한다.
게다가 혼인한지 7년만에 첫아기를 낳으셨으니 외할머니 마음 고생이
매우 크셨을 것 같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나다.
아버지는 어찌나 엄격하신지 걷는 것 먹는 것도 일일이 지적하셨다.
아버지가 웃으신걸 본적이 없고 다정한 말씀을 들어본적이 없다.
외가 외에는 가본 곳이 없던 내가 국민학교 예비 소집일에 가본 학교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넓은 운동장에 그네,미끄럼틀,철봉도 있고 2층으로 지은 교실도 신기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왜 그렇게 커 보이던지.
학교 앞으로는 버스가 다니고 과자를 파는 상점도 있네.
저건 우체국, 저건 경찰서,저건 면사무소,저건 음식점.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시간을 걸어서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개근상도 타고 우등상도 탔다.
웅변도 하고 학교대표로 읍내 국민학교에 가서 시험도 치뤘다.
가끔 유년시절의 기억을 한 편씩 꺼내서 보면 그때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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