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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큰어머니의 필사

by 생각총총 2021. 12. 15.

돌아가신 큰어머니가 시집 오실때 '박씨부인'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 이렇게 세권의 책을 필사해서 가지고 오셨다.

어릴때 본 그 책은 지금의 한글과 약간 달랐지만 참 재미있었다.

딸이 없는 큰어머니는 어린 나를 딸이라 생각하시고 예뻐하고 보살펴주셨다.

가끔은 옛날 이야기도 해주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교과서를 받아오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그때 귀했던 달력으로 책을 싸 주셨고

어린게 먼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는걸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셨다.

나는 바로 옆 큰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큰어머니가 연세 드셨을 무렵 시골마을에 골동품을 사러 다니는 사람들이 늘었다.

옛날 화로,다리미 ,인두,오래된 책등을 헐값에 사갔고 시골 어른들은 쓸모 없어진 물건을 돈을 받고 파니 다들 좋아했다.

그 가치가 얼마인지도 모른채.

어느날 큰어머니집에 한 아저씨가 와서 옛날 물건 없냐고 하니 큰어머니는 무심코 필사한 책이 있다고 했고 아저씨는

반색을 하며 3만원에 그 책을 사갔다고 한다.

마치 큰 선심을 쓴척 하고서.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나는 너무 아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생각해도 아깝다.

붓으로 한자 한자 적어서 완성한 그 귀한 책을 헐값에 넘겼으니 다시 생각해도 아깝다.

한가한 겨울에 따뜻한 아랫목에 나를 앉히고 옛날 이야기를 해 주시던 큰어머니는 말년에 치매를 앓으셨다.

건강하고 똑똑한 분도 치매에 걸린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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