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큰어머니는 그 시절 뼈대있는 양반의 딸로 사시다 7남매의 맏이인
큰아버지께 시집을 오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1년에 10번이 넘는 제사를 지내고 시동생 넷
시누이 둘과 살며 결혼시키기 까지 열심히 사셨다.
심지어 막내 작은 아버지와 큰오빠는 한해에 태어났고 젖이 부족한 할머니 대신
시동생과 아들을 한꺼번에 젖을 먹여 키우셨다고 한다.
동서인 엄마와 작은 엄마가 출산할때는 산파 역할까지 하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서당에 기거하셨는데 명절을 제외하고는 삼시세끼를 큰어머니는
할아버지 밥상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셨다.
가끔 엄마와 작은 엄마가 거들었지만 큰어머니의 수고에 비할바가 아니다.
큰어머니는 아들 셋을 낳고 단산이 되셨는데 셋째 오빠와 7살 차이로 내가 태어나자 너무나 예뻐하셔서
엄마가 젖을 먹일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큰엄마가 안고 계셨다고 한다.
큰집과 우리집은 나란히 붙어 있다.
아버지께 야단맞으면 큰어머니가 쫓아 와서 나를 데리고 가셨다고 하고
엄마가 나를 야단치면 오히려 엄마가 큰어머니께 야단을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동네사람들이 해 주었다.
딸이 셋인 엄마를 내내 부러워하던 큰엄마는 먼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던 나를 대견해 하셨고 새학기가 되어 교과서를 받아오면 당시는 귀했던 달력으로 책을 싸주셨다.
내가 외삼촌을 따라 서울로 가던날 그야말로 버선발로 대문밖까지 나오셔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큰어머니등에 업힌 어린 내가 늘 말했다고 한다.
"큰엄마.,내가 커서 돈 많이 벌어 큰엄마 옷 사줄게"라고 .
어른이 된 나는 이 약속을 열심히 지켰다.
고향에 갈 때면 색깔만 다르게 큰어머니와 엄마의 옷을 똑같이 사고 용돈도 드렸다.
동생들도 나처럼 똑같이 했다.
결혼하여 남편과 친정에 가면 엄마를 제치고 진수성찬을 차려 당신의 사위인양 남편을 살뜰히 챙겼다.
씨암탉을 잡고 오리를 잡아 남편입에 넣어주셨다.
엄마가 회갑이었을때 남편은 큰어머니와 엄마를 제주도 여행을 시켜 드려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받았다.
큰어머니 팔순 잔치때 사회자에게 나를 딸이라고 소개해서 할수 없이 노래를 불렀었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건강하시던 큰어머니는 말년에 치매를 앓아 요양병원에 오래 계셨다.
남편과 내가 가도 알아보지 못하고 눈만 껌벅껌벅 하셔서 인생 무상을 또 한번 느끼게 했다.
오직 셋째 오빠만 알아보셨다.
엄마 보다도 작은 엄마 보다도 더 오래 사시다 97세에 돌아가셨다.
살면서 마음을 다쳐 아프고 억울할때면 그래도 사랑받았던 아득한 유년시절이 있었다고 나를 다독인다.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아라'라고 하신 엄마의 말도 위로가 되었다.
조카딸을 친딸로 여기는 큰어머니는 아마도 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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